[스크랩] [노들야학 30주년] 평등한 밥상 좋다, 쭉 가자!(들다방의 역사)

[노들야학 30주년] 평등한 밥상 좋다, 쭉 가자! / 김유미

노들야학에서 무상급식을 하기까지

2014년 노들에서 ‘급식’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밥을 먹기 시작한 역사적인 날 4월 1일, 당시 교장이던 박경석 고장은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2012년 활동지원 시간이 부족해 집에 혼자 있던 김주영 씨가 화마를 피하지 못해 사망하는 참사가 있었고, 장애인운동가들이 이에 항의하며 광화문 일대에서 노제를 진행한 것에 큰 벌금이 떨어졌었다. 박 고장은 김주영의 죽음에 대해 사회의 책임을 묻는 활동가들에게 벌금으로 재갈을 물리려는 처사에 저항하는 자진 노역 투쟁을 하고 있었다. 당시 모 기업 회장은 노역을 통해 하루에 5억 원을 탕감받았는데, 우리 박 고장은 하루에 5만 원을 탕감받아 이를 비교하여 꼬집는 ‘황제 노역’ 보도들이 나오기도 했다.노들야학에서 밥은 공동체 내부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는 문제였다. 혼자서 밥을 먹지 못하는 중증장애 학생들에게 밥이란 ‘그림의 떡’, 밥값을 내기 어려운 가난한 학생들에겐 매 끼니가 부담 그 자체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학생들은 야학에 와서 쫄쫄 굶은 채 수업을 듣고, 이를 지켜보는 비장애 교사와 상근자들은 선명치 않은 죄책감 속에서 덩달아 굶거나, 몰래 나가서 밥을 먹고 오는 웃픈 일상이 펼쳐지던 때였다. 밥을 둘러싼 서러움과 죄책감을 풀어내기 위해 돈 문제는 덮어두고, 아니 일단 시작한 뒤 돈 문제는 같이 해결해 나가기로 결의하고, 급식을 시작하게 되었다.2014년 4월 1일 교실 한쪽에 주방 설비를 갖추고 내부 시범 운영을 시작했다. 주방전담 인력이 많은 양의 밥을 해보고, 상근자들이 밥을 먹어보며 급식 시스템을 점검하는 시범 운영이었다. 급식 준비만으로도 정신 사나운 때에 박 고장은 3월 29일부터 자진 노역에 들어간 상태였고, 노들야학은 3월 31일부터 저녁 7시에 서울구치소를 찾아가 그 앞에서 현장 수업을 진행했다. 고병권 선생님이 칸트 강의를 하고, 노들음악대가 음악수업을 하고, 야마가타 트윅스터가 구치소 정문 앞에서 「이단옆차기」를 부르는 현장 수업이었다. 다행히 고장 샘은 누군가의 벌금 대납으로 4월 2일 출소했고, 야학으로 와서 급식장을 둘러보고 점심을 드시고, 두부도 드셨다.당시 밥값은 3,000원이었다. 정부의 지원이나 보조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끼리 일단 해 먹어보는 단계였다. 학생, 교사, 활동지원사, 상근자 모두 똑같이 1끼에 3,000원을 내고 밥을 먹었다. 시범 운영을 마치고, 4월 7일 학생들과 함께 저녁밥을 먹으면서 급식은 본격 시행에 들어갔다.

나는 노들야학의 급식 이야기를 정리하기 위해 2014년의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는데, 그 시절의 모습에 너무 놀라고 말았다. 박 고장의 자진 노역 중에 급식을 시작했고, 그로부터 며칠 뒤인 4월 13일 혼자 집에 있던 송국현 씨 집에 불이 나 중태에 빠지는 큰 사고가 있었다. 사고 소식에, 하던 일을 놓고 그의 집에 카메라를 메고 달려간 기억이 났다. 송국현은 탈시설해 노들야학에 갓 입학한 신입 학생이었다. 그는 장애등급의 문제로 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제도 개선을 요구하던 시기에 화재 사고를 당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4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4월 16일에는 세월호 침몰 참사가 있었고, 모두가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그날들 이후로 얼마나 오래도록 거리에서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참담한 심정. 그럼에도 나는 매일 밥을 먹었다. 노들에서 학생들,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밥값을 받으며 시작한 급식 사업이었지만, 재료비와 주방 인건비, 운영비를 빼고 나면 돈이 모자랐다. 주방을 마련하며 쓴 돈도 메꿔야 했고, 3천 원이라는 싼 밥값도 운영을 계속해서 어렵게 하는 요인이었다. 서울시, 서울시교육청을 찾아다니며 급식비 요청을 해보았지만, 야학에 급식비를 지원할 만한 법적 근거가 없다고 했다. 당시 서울시장이던 박원순 씨가 4월 14일 야학을 방문해 급식 공간을 둘러보고 갔지만, 지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야학은 매년 교육기금이나 운영비 마련을 목적으로 열어오던 후원 행사를 2014년부터 ‘급식비 마련’을 목표로 열게 된다. 2014년 후원마당의 이름을 ‘씩씩한(食食한) 후원주점’으로 정하고, 야학 1층 주차장에서 후원주점을 열어 급식 기금을 모았다. 때마침 홍은전이 노들야학 20년 역사를 기록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가 출간돼 후원주점과 북 콘서트를 겸한 후원 행사로 진행했다. 그렇게 후원 행사에서 모금한 돈을 보태어 급식을 계속 진행했다.

2014년 노들야학 후원주점 티켓 이미지. ‘씩씩한 후원주점. 노들에서 60명의 학생과 함께 씩씩한 급식을 시작하려 합니다. 밥을 함께 먹는 작업은 공동체의 또 다른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함께 소박하게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후원을 부탁드립니다’라고 적혀 있다.
2014년 노들야학 후원주점 티켓 이미지. ‘씩씩한 후원주점. 노들에서 60명의 학생과 함께 씩씩한 급식을 시작하려 합니다. 밥을 함께 먹는 작업은 공동체의 또 다른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함께 소박하게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후원을 부탁드립니다’라고 적혀 있다.
2017년 노들야학 후원주점 티켓 이미지. ‘6.10 급식 항쟁. 노들장애인야학 무상급식을 위하여’라고 적혀 있다.
2017년 노들야학 후원주점 티켓 이미지. ‘6.10 급식 항쟁. 노들장애인야학 무상급식을 위하여’라고 적혀 있다.
2019년 노들야학 후원주점 티켓 이미지. ‘2019 노들장애인야학 평등한 밥상’이라고 적혀 있다.
2019년 노들야학 후원주점 티켓 이미지. ‘2019 노들장애인야학 평등한 밥상’이라고 적혀 있다.

– 학생 무상급식을 이뤄내는 과정

하지만 밥값 3,000원, 이것이 누군가에겐 넘지 못할 장벽이 되고 있었다. 배식하는 교실 주변에 맴돌며 밥을 먹지 않는 학생분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밥 왜 안 드시냐는 물음에 처음엔 반찬이 마음에 안 든다거나 아까 뭘 먹었다거나 하는 식이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진짜 이유는 ‘오늘은 삼천 원이 없다’였다. 그래서 야학은 학생 밥값을 조금씩 낮추고, 학생 아닌 자들의 밥값을 슬금슬금 올리는 방향으로 운영을 해나가게 되었다. 학생 아닌 외부 손님, 유료 식객을 유치해야 급식자금이 모이는 구조가 된 셈이었다. 상근자들을 무조건 야학에서 밥을 먹게도 해보고, 주변 사람들이 오면 꼭 야학에서 밥을 먹고 가게 하는 전략을 써보기도 했다. 어쨌든 이런 재정난을 겪으면서도 노들은 2015년에 학생 밥값을 2,000원, 1,000원으로 낮추고, 2016년부터 0원, 학생 밥값은 받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후원 행사를 통해 일 년 치 학생 밥값을 모아야 했기에, 매년 홍보도 열심히, 주점 메뉴 개발도 열심히, 당일 공연도 열심히 준비하게 됐다.

• 2015년: 씩씩한 후원주점 “2천 원에 밥 먹자” (밥값을 3천 원에서 2천 원으로 내렸대. – 그래서 적자야~ 적자~ – 헐~ – 우리 밥은 계속 먹어야 되는데… – 그럼 우리 후원주점 티켓 많이 팔아요.)

• 2016년: 밥상이 나르샤 – 급식을 위한 노들장애인야학 후원마당(주점+바자회)

• 2017년: 6.10 급식항쟁 – 노들장애인야학 무상급식을 위하여 후원마당(주점+바자회)

• 2018년: 평등한 밥상 – 노들장애인야학 무상급식 마련 후원마당 주점·바자회

• 2019년: 평등한 밥상 – 무상급식 마련 후원마당 주점·바자회

야학 교사와 학생들은 매년 호프 티켓을 들고 아는 사람과 연대 단체를 찾아다니며 모금 활동을 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마음속으로 각설이타령을 하며, 호프 티켓을 들고 여기저기 많이 쏘다녔다. 우리를 지지해 줄 것 같은 곳의 연락처를 쭉 뽑아놓고, 종일 전화를 돌리는 날도 있었다. 민망하기 짝이 없고 고단함이 대단했지만, 적극적으로 지갑을 탁 여는 누군가를 만날 때나 생각지도 못한 많은 돈을 후원하는 분들을 만나면 마음이 감동의 물결로 찰랑거렸다.

후원 행사 당일이 되면, 학생과 교사가 지닌 각자의 연결망을 통해 각지에서 후원인들이 찾아왔다. 그리고 행사장에서 정말 원 없이 놀다 가시는 분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그것 역시 큰 기쁨이 되어주었다. 주차장은 사실 앉아서 음식을 먹기에 난감한 공간인데, 침침한 그곳에 장식물을 치렁치렁 달고 탁자를 놓고 조명을 켜면 특색있는 주막이 되었다. 그런 공간에서 ‘평화의 나무 합창단’이 합창 공연을 웅장하게 해버리고, 쿨레칸이 연주와 춤으로 공간을 축제 장소로 바꿔버리고, 야마가타 트윅스터가 음악으로 사람들을 홀려 마로니에공원과 큰길까지 데리고 나갔다 오는, 세상에 또 없을 후원 행사를 보고 있노라면, 나 역시 이곳의 손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더랬다. 어쨌든, 이런저런 노력이 모여 학생 무상급식을 자체적인 힘으로 해나가기 시작했다. 후원 행사 때 시민들이 한푼 두푼 모아준 후원금과 한살림에서 매달 보내주는 쌀, 인근 교회나 후원인들이 나눠준 식재료 덕분에 야학은 학생 무상급식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시민들의 지지와 연대로 차려지는 밥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노들의 밥상이 자랑스러울 때가 있다.

2014년, 주차장에서 열린 후원주점. 많은 사람이 모여 먹고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 김유미
2014년, 주차장에서 열린 후원주점. 많은 사람이 모여 먹고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 김유미
2014년, 주차장에서 열린 후원주점. 사람들이 모여 먹고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 김유미
2014년, 주차장에서 열린 후원주점. 사람들이 모여 먹고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 김유미
2016년, 주차장에서 열린 후원주점. 사람들이 댄스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 김유미
2016년, 주차장에서 열린 후원주점. 사람들이 댄스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 김유미
2016년, 주차장에서 열린 후원주점. 사람들이 바투카다 연주를 하고 있다. 사진 김유미
2016년, 주차장에서 열린 후원주점. 사람들이 바투카다 연주를 하고 있다. 사진 김유미

들다방의 탄생

학생 밥값이 무료가 되고, 야학의 낮수업이 정착하면서 학생분들은 점심, 저녁으로 밥을 열심히 드시기 시작했다. 야학 낮수업에 참여하는 분 중에는 일찌감치 야학에 와서 점심을 드시고 낮수업 하고, 저녁을 드시고 밤수업에 참여하는 분도 있었다. 또한 장애인거주시설에서 막 탈시설한 학생분들에게는 야학과 급식이 일상의 중요한 자원이 되어주었다. 그리하여 야학을 찾는 학생들이 점차 늘어나고, 2층 복도가 전동휠체어 행렬로 꽉 막히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행히도 2015년 말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야학 공간을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야학 건물 4층을 임대해 교실과 강당을 만들고, 2층 교실 구석에 있던 급식 주방을 4층으로 확장 이전하게 되었다. 주방 창고도 만들고, 대용량 가스 설비도 갖추고, 바닥 방수 공사도 하면서 나름대로 제대로 된 급식시설의 초석을 다지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급식 운영에 대한 정부 지원은 이뤄지지 않았기에, 모금 활동과 유료 식객이 있어야 급식이 유지되는 상황은 계속되었다. 업무 진행에도 부침이 있었다. 그간 야학과 사단법인 노란들판이 협력해 급식 사업을 운영했지만, 이제는 전적으로 이 일을 맡아나갈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2016년 말 ‘들다방’이 만들어지게 된다. 야학에서 4층의 쓰임을 구상할 때 급식 주방 옆에 카페 공간을 기획했는데, 들다방이 야학의 협력 기관이 되어 급식과 카페 일을 책임지기로 한 것이다. 들다방의 ‘들’은 노란들판의 세 번째 글자 들에서 따온 것이고, 다방의 ‘다’는 복합적인 활동을 많이 하겠다는 뜻을 담아 붙였다.

다방, 그러니까 카페 역시 시범 운영 기간을 거쳐 문을 열게 되었다. 카페는 전담 인력이 없이 나와 박누리 활동가가 유하 바리스타로부터 커피 만드는 기술을 전수한 뒤 수많은 실수를 거쳐, 꽤 오래 시범 운영을 한 뒤 운영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나와 박누리는 수업도 해야 하고 야학 일을 해야 했기에, 카페를 책임지고 운영할 전담 바리스타가 필요했다. 때마침 발달장애인 취업 지원 기관과 연결돼 바리스타들과 잡코치를 소개받게 되었고, 이들과 정말 찌그렁빠그렁하면서 운영을 해나가게 된다. 매끄럽게 진행되는 일이 없이 매일 우당탕탕 하고 펑크가 나기 일쑤였다. 노들야학처럼 들다방도 불안정 속에서 위태롭게 안정을 추구하며 운영을 이어갔다. 들다방 일을 담당했던 나는 일이 많아도 너무 많다고 느끼면서도, 매일 신나게 밥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과 카페라테에 시럽을 왕창 타서 마시며 즐거워하는 학생들 모습에 위안을 받았다. 다행히 카페도 주방도 일하는 사람들이 정해지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2018년에 들다방은 서울시 예비사회적기업으로 선정되고, 2021년에는 고용노동부가 인증하는 정식 사회적기업이 되었다. 사회적기업 자격으로 인건비를 지원받아 급식 주방에 인력을 충원하고, 사업개발비를 지원받아 만든 그림 메뉴판, 사진 메뉴판은 지금도 잘 사용 중이다.

코로나19와

코로나19의 대유행은 야학 입장에서도 들다방 입장에서도 매우 난감했다. 야학은 확진자가 발생하던 시기에 휴교와 재택수업을 하기도 했고, 그럴 때면 들다방엔 밥 먹으러 오는 사람이 확 줄었다. 어떤 날은 나 혼자 들다방에 앉아 주방 조리사님들을 한 번씩 바라보며 밥을 먹기도 했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던 식당의 모습은 사라지고, 마스크를 쓰고 입장해 손 소독을 한 뒤 1인 테이블, 투명 칸막이 안에 앉아 각자 밥을 먹는 뉴노멀이 찾아왔다. 손님이 없다고 해서 문을 닫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들다방과 야학은 어떻게든 뭐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반찬을 만들어 학생들 집에 가져다주는 일을 기획하게 된다. 들다방에서 반찬 담을 용기를 사고, 장조림과 마른반찬들을 만들어 담은 뒤, 야학에서 학생들이 사는 곳으로 직접 갖다 나르는 일이었다. 반찬과 함께 여러 후원자가 나눠준 마스크, 비타민 같은 것들도 함께 챙겨 나눴다. 반찬을 빌미로 가정방문을 하고, 안부를 나누던 날들이 지금도 종종 기억난다.

후원 행사 역시 어려움 투성이었다. 그간 해온 후원마당은 음식과 주류를 나누던 잔치 같은 모금 행사였는데, 함께 먹을 수 없게 되자 머리에 안개가 낀 느낌으로 기획 단계에서부터 버벅거리게 되었다. 또한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와 정부 지침에 따라 모임이 규제되면서 후원 행사의 날짜도 여러 번 바꿔야 했다. 2020년 후원마당 행사는 마로니에공원에서 진행하기로 하고, 후원자들이 찾아오면 도시락 형태로 음식을 나누기로 했다. 아주 간단한 음식으로 메뉴를 줄이고, 모두 포장해서 가져갈 수 있게 준비해 두었다. 또 음식 대신 커피 드립백, 마스크, 책 같은 후원 물품을 가져갈 수 있도록 준비하기도 했다. ‘평등한 밥상을 안전하게 즐기는 방법’을 정리해 행사 안내를 했는데, 지금 다시 보아도 그때는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다. “음식을 드실 때는 옆 사람과 2m 거리를 유지해 주세요.” 어찌 됐든 3년간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상태 속에서도 ‘평등한 밥상’의 노력은 계속 이어졌다.

• 2020년 10월 23일: 평등한 밥상

• 2021년 11월 19일: 평등한 밥상

• 2022년 10월 14일: 평등한 밥상

* 장소: 마로니에공원

2022년이 되면서, 드디어 서울시가 급식비 절반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그 전부터 협상을 통해 어느 정도를 지원할지 그 규모와 지원 근거를 두고 옥신각신하면서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리하여 이제 매일 밥 먹을 때 학생들 식사 장면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급식 메뉴도 정리해서 보고할 자료를 만들며 지원금을 받는다.

2020년 평등한 밥상 행사 포스터. ‘평등한 밥상 안전하고 즐겁게 참여하는 방법’, ‘코로나19 감염이 걱정스러운 시절,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될 때’ 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2020년 평등한 밥상 행사 포스터. ‘평등한 밥상 안전하고 즐겁게 참여하는 방법’, ‘코로나19 감염이 걱정스러운 시절,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될 때’ 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2021년 평등한 밥상 메뉴판 이미지. ‘현장에서 즐기는 포장 음식 대공개’라는 문구와 함께 뱅쇼, 머피, 호박스프, 비건 도시락 등의 메뉴가 나열돼 있다.
2021년 평등한 밥상 메뉴판 이미지. ‘현장에서 즐기는 포장 음식 대공개’라는 문구와 함께 뱅쇼, 머피, 호박스프, 비건 도시락 등의 메뉴가 나열돼 있다.

다시, 마주 보는 밥상

2023년 마침내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고, 들다방 식사 테이블의 투명 칸막이를 모두 제거했다. 다시 서로 마주 보고 앉을 수 있게 테이블을 바꾸었고, 구조가 바뀌자 사람들이 밥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웃기도 한다. 요즘 들다방 고령의 조리사들은 비건 요리를 배우고 있다. 강사를 모셔 와 교육 시간을 마련하고 실습도 같이 해보면서, 이제 노들 급식은 비건 선택권이 보장되는 밥상이 되어가고 있다. 카페 역시 우유 대신 두유, 오트밀을 선택할 수 있게 했고, 간식은 모두 비건용으로 채워두고 있다. 비건은, 음식을 앞에 두고 서성이는 또 다른 사람이 있지는 않은지 살피며 찾아낸 과제였다. 물론 고기반찬을 더 많이 해달라고 요청하는 분들이 있고, ‘잡식가족의 딜레마’는 계속되고 있다.

들다방의 두 번째 대표가 된 박준호는 주방에 설거지하러 오기로 한 학생이 갑자기 나오지 않으면, 앞치마를 두르고 대신 설거지를 하러 들어간다. 근처 장애청소년 방과 후 지원센터나 다른 장애인 기관에서 주문한 도시락을 싣고 배달을 가기도 하고, 온갖 펑크난 일을 메우며 바쁘게 활동한다.

야학에서 하루 두 끼를 꼬박꼬박 먹는 학생 김장기는 들다방에서 그야말로 울고 웃는다. 어떤 날은 눈물을 손으로 비비며 들어와 “이모 ○○이가 나한테 뭐라고 했어, 밥 안 먹어”했다가, 어떤 날은 “우와 밥맛이 꿀맛이여”하며 깔깔 웃는다. 모르는 사람이 자기 앞자리에 앉으면 “저는 한성대 아파트 사는 김장깁니다”하고 인사를 건네고, 긴 수다와 함께 밥을 먹는다. 김희자는 “나는 국 안 먹어 안 먹어 안 먹어” 매일 자기 취향을 알려주고, 고지선은 밥을 푸며 “한 개만 먹어” 노래 같은 혼잣말을 한다. 주방 앞에선 앞치마를 입은 박희용이 밥 먹는 사람들을 주시하며, 식판 반납하기를 요청하는 무언의 눈빛 레이저를 끝없이 쏘고 있다. 나는 들다방에서 매일 회식하는 기분으로 밥을 먹는다.

밥을 먹고 나가는 길엔 김명학이 나를 자주 불러 세운다. 야학 공동교장인 김명학은 책상 높낮이가 조절되는 입구 쪽 테이블에 앉아 밥 먹으러 온 학생들, 지원사들, 활동가들을 챙긴다. 주머니에서 약과를 꺼내 나눠주거나 차 한잔하라고 불러세우는 것이다. “유미 동상 내 이름으로 커피 한잔 마셔” 그야말로 다정한 밥상이다.

지난 10년간 노들이 조금 단단해졌다면, 그건 밥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시민이 차려준 밥상에서 함께 밥을 먹고, 공부하고, 그 힘으로 세상을 쏘다니며 우당탕탕 투쟁하는 곳. 30주년을 맞은 노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모두 밥 잘 챙겨 먹으면 좋겠다. ‘평등한 밥상’ 좋다, 쭉 가자!

2023년, 들다방 급식 풍경. 사람들이 줄을 서서 밥과 반찬을 접시에 담고 있다. 테이블에서 식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진 김유미
2023년, 들다방 급식 풍경. 사람들이 줄을 서서 밥과 반찬을 접시에 담고 있다. 테이블에서 식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진 김유미
2023년, 들다방 급식 풍경. 사람들이 밥과 반찬을 접시에 담고 있다. 사진 김유미
2023년, 들다방 급식 풍경. 사람들이 밥과 반찬을 접시에 담고 있다. 사진 김유미

필자 소개

김유미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노들에서 이 일 저 일 해보며 많이 배웠다고 생각하는 사람.

김유미, 「[노들야학 30주년] 평등한 밥상 좋다, 쭉 가자!」, 『비마이너』, 2023년 11월 14일.

* 이 글은 «노들바람» 135호에도 게재됐습니다.

출처: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5649

글쓴이 : 들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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